[ 말, 말 Walking and Riding: On Letters and Motion ]

2026년은 병오년, 붉은 말의 해이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말(馬)을 길들였다. 수레를 끄는 것을 시작으로 기원전 3000년경 기마술(騎馬術)이 시작되었다. 인간은 말을 타면서 세상을 인식하고 이동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말과 함께 인류는 더 멀리, 더 빠르게 나아갈 수 있었고, 더 넓은 세계를 마주하고 상상할 수 있었다. 하루의 거리와 도시의 크기, 소식이 도달하는 범위는 말을 통해 재편되었으며, 인류가 인지하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감각 또한 달라졌다. 말(馬)은 오랜 시간 함께해 온 친구였다. 인류는 말을 통해 종의 신체적 한계를 뛰어 넘었으며, 동시에 말의 호흡과 속도에 몸을 맞추는 법을 배웠다. 말은 인류의 세상을 확장해 준 동반자였다.

인류는 또 다른 말(言), 언어와 문자를 통해서도 다른 형태의 확장을 경험했다. 말은 본래 소리로 존재하며 짧은 시간에 발생하고 사라진다. 그래서 생겨난 문자는 이 사라지는 말을 붙잡기 위해 만들어진 기호 체계였다. 그 결과 인간은 말로 남길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넘어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직접 가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마주하고 상상할 수 있게 되었고, 몸이 닿지 않는 거리까지 사고를 이동시킬 수 있게 되었다. 문자는 인간의 경험을 확장하고 지식을 축척 가능하게 한 도구였다. 최초의 문자는 수메르의 쐐기문자이다. 이집트 히에로글리프가 조금 더 빠르다는 주장도 있다. 무엇이 먼저이든, 이 두 문자의 사용 시기는 모두 기원전 3000–3500년 전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말(馬)과 말(言), 이 두 말은 인간의 세상을 각각 물리적·관념적으로 확장시켰다. 이 두 확장은 서로 다른 영역의 사건처럼 보이지만, 비슷한 시기에 생겨났고 구조적으로도 닮아 있다. 둘 다 인간의 경험과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방식을 제공했다. 더 멀리 갈 수 있게 된 만큼, 더 많은 것을 한 번에 마주하게 되었고, 그만큼 세상은 압축된 인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 전시는 이러한 두 ‘말’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말, 말〉은 그래픽디자이너와 폰트디자이너(태룡님, 폰트디자이너로 표기하면 될까요?)가 약 10여 주간(총 몇주였죠…?)의 워크숍을 통해 모션그래픽을 배우고 실험한 결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그 목적은 모션그래픽의 완성도를 증명하는 데 있지 않다. 이 전시는 인쇄와 같은 정지된 아날로그 매체에 익숙한 그래픽디자이너들이 ‘시간’과 ‘움직임’이라는 조건을 처음으로 통과하며, 자신의 시각언어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를 탐구해 본 과정에 가깝다.

그래픽디자인의 ‘그래픽(graphic)’은 그리스어 graphia—쓰다, 그리다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타이포그래피와 타입디자인의 ‘타입(type)’ 또한 typos, 즉 새기다, 찍어내다라는 의미에서 비롯되었다. 그래픽과 타입은 모두 손의 행위를 전제로 하며, 물성을 지니고 멈춰 있는 매체를 기본 조건으로 한다. 관념적 기호 체계인 문자는 지면에 쓰이는 순간에서야 구체적인 형태를 가진 글자이자 이미지가 된다. 활자는 나무를 깎거나 금속을 주조해 만들어지고, 인쇄물은 종이의 크기와 질감, 잉크의 농도와 색, 독자가 직접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지면서 마주하게 될 최종 매체를 비교적 세밀하게 통제한다. 현대의 디자이너는 디지털 도구의 발전으로 컴퓨터 앞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지만, 시각언어를 다루는 행위는 여전히 그래픽 디자이너의 눈과 손에서 시작된다.

그래픽디자인이 다루는 것은 형태이지만, 그 이면에는 말(言)이 있다. 그래픽디자인은 흘러가는 말(言)을 시각언어를 통해 멈춰 세우고, 소통 가능하게 만들며, 오래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드는 기술이었다. 문자는 말(言)을 기록할 수 있게 만들었고, 인쇄는 그 고정 상태를 가장 안정적으로 유지해 온 매체였다. 이러한 그래픽디자이너의 언어는 ‘걷기’와 닮아 있다. 걷는다는 것은 천천히 이동하며 멈출 수 있고, 되돌아볼 수 있는 상태다. 멀게는 경치를 천천히 음미하고, 가까이 다가가 표면을 살피며, 눈과 피부로 작은 차이를 감지해 세상을 보다 세밀하게 이해하는 방식이다.

반면 모션은 전혀 다른 조건을 갖고 있다. 모션은 기술의 발달과 함께 등장한 매체이며,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 시간축 위에서만 존재한다. 보다 정확이 말하면 인간은 시간의 흐름을 직접적으로 인지할 수 없기 때문에, 조형의 ‘움직임’이나 ‘변화’를 통해 시간을 간접적으로 인식한다. 즉, 모션그래픽은 ‘시간’을 인식하기 위해 조형의 ‘움직임’과 ‘변화’를 활용하는 매체다. 그리고 모션그래픽의 최종 소비 환경은 디자이너의 선택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각기 다른 크기와 해상도, 비율과 밝기를 가진 수많은 화면 위에서 재생된다. 이로 인해 모션은 인쇄와 비교했을 때 보다 관념적인 상태에 놓이며, 디자이너가 모든 요소를 통제하기는 어렵다. ‘걷기’ 보다는 ‘기마(騎馬)’의 행위와 비슷하다.

이 시점에서 걷기와 기마(騎馬)의 은유가 등장한다. 걷는 사람은 세상을 자세히 볼 수 있지만, 도달할 수 있는 범위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말(馬)은 걷기를 대체하지 않는다. 말은 걷는 인간을 무력화하지도, 그 방식을 폐기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걷기의 의미를 더 분명하게 만든다. 말을 타는 사람은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지만, 모든 것을 세밀하게 들여다볼 수는 없다. 속도가 빨라질수록 장면은 스쳐 지나가고, 풍경은 하나의 인상으로 거칠게 압축된다.

주마등이란, 빠르게 이동하면서 인식하는 속도가 이해와 해석의 속도를 앞지를 때 발생하는 상태를 말한다. 이때 장면은 의미로 정착되기 전에 흘러가 버리고, 인식은 눈과 머리 사이의 간극이 생긴다. 말만 타고 다니는 사람은 스쳐 지나가는 주마등처럼 나무잎의 섬세한 잎맥을 천천히 들여다보지 못한다. 그러나 걷기와 기마(騎馬)는 상호 보완적일 수 있다. 걷기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 말을 타고 멀리 나아가 세상을 확장한다면,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기마를 통한 세상의 확장을 경험한 이후에 잠시 멈추어 천천히 걸어본다면, 세상은 이전보다 훨씬 넓고 깊게 인식될 수 있다.

그래픽디자이너에게 모션은 말(馬)과 같다. 모션그래픽은 그래픽디자이너가 여태껏 섬세히 다루어 온 시각언어를 휘발시키며 가볍게 흘려보내는, 배타적으로 대할 기술이 아니다. 오히려 그래픽디자이너의 말(言)—시각언어를 더 확장할 수 있는 도구이자 동반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기술이다. 이 전시는 그래픽디자이너들이 자신의 언어를 처음으로 의도적으로 흘려 보내보기도 하고, 더 멀리 태워 보내보고, 다시 붙잡아 본 순간들을 담고 있다. 참여자들은 각자의 분야에서는 숙련된 디자이너이지만, 모션그래픽에서는 아직 초심자이기 때문에 어떤 작업은 아직 모션이라는 말(馬)과 호흡이 맞지 않고, 어떤 작업은 속도가 지나쳐 의미를 놓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작업의 끝에는 달려 나갔다가 다시 멈춰 서서 새로운 풍경을 천천히 바라보는, 걷기의 의미를 아는 자들의 관점이 포함되어 있다.

〈말, 말〉은 무엇이 더 좋은가를 말하지 않는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정직함과 화려함, 정지와 시간 사이의 우열을 가르지 않는다. 대신 이 전시는 묻는다. 말(馬)과 말(言)이라는 도구가 만들어내는 조건은 경험과 인식, 그리고 시각언어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이동·전달 방식이 달라질 때, 우리는 무엇을 얻게 되고 무엇을 놓치는가.

이 전시는 끝없이 달리는 전시도, 빠름과 화려함을 숭배하는 전시도 아니다. 말을 타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갔다가, 다시 내려서 이전에는 닿을 수 없었던 새로운 풍경을 천천히 바라보는 경험, 혹은 그 왕복의 과정이 이 전시의 중심에 있다. 확장된 세상 속에서 은유된 말(馬)과 말(言)을 다루는 법, 그리고 움직임과 속도를 스스로 선택하는 태도에 대하여 탐구한다.

참여:
강동완 @wann_k , 권혜은 @heikgraphicheik , 김은지 @ant.graphics , 김태룡 @taeryong.kim , 문장현 @moons_works , 원성연 @ao.graphics.official , 유예나 @yooja099 , 이진우 @lift_off.leejinwoo , 채병록 @chae_byungrok , 최인 @inni_line 

기간. 1월 20일(화)–1월 25일(일)
시간. 11:00–20:00
장소. XXPRESS @xxpress.official , 서울 마포구 포은로 99, 1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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